나이 90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60을 바라보는 딸이 바닷가 모래 무더기에 발을 묻었다.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밀쳐내어서 뜨거운 태양도 견딜만 했다. 갈매기들이 소란을 피우며 주변을 맴돌았고 해변에 있는 나무기둥 위에 꽂힌 성조기들이 힘차게 펄럭였다. 멀찍이서 일광욕을 즐기는 몇 사람은 정물같았다. 설탕같은 모래들은 푸른 하늘아래 흰 살을 들어내고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따뜻한 모래들이 발가락을 간질렀다. 발에서 올라오는 온기를 온몸으로 즐기며 모녀는 느긋하게 한적한 환경에 푹 빠졌다.
미시시피 해변가 마을은 태풍 카타리나 이후로 많이 변했다. 정취있고 아름답던 고옥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그 집터들만 덩그라니 남았다. 태풍을 견뎌낸 떡갈나무의 싱그런 푸른 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휘어진 가지에 달린 잎들이 빈 집터에 그늘을 드리웠으나 그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이제 없다. 해변을 끼고 있는 90번 도로는 말끔하게 새로 보수 되었다. 그러나 바람을 따라간 모래들이 도로의 반을 하얗게 덮어서 지나는 차들이 모래를 피하느라 속도를 줄였다.
바람과 모래는 사람보다 먼저 이땅을 차지했었다. 태고에 이 땅에 살았던 생명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는데 옆에서 어머니가 예전에 초롱초롱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포항 해변가로 놀러갔던 일을 회상하셨다. 그리고 일제시대와 전쟁을 여러번 겪은 체험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흘리셨다. 정신대를 피해서 일본서 공부하다 돌아온 아버지와 급하게 치른 결혼이야기는 동화였다. 70여년 전의 시집살이 애환들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많은 친지들의 얼굴이 뜨거운 열기되어 가물거렸다.
피임약이 없던 시절, 줄줄이 생기는 대로 아이를 8명 이나 낳는 바람에 아이들 키우고 교육시키느라 힘들었던 사연들이 한숨 짓듯 이어졌다. 많은 형제들에 불평하며 자랐던 내 기억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어머니의 기억 창고에서 쏟아져 나온 단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어제와 오늘을 들락였고 그리고 한국과 미국을 들락이며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러나 어려운 시절을 살았던 어머니 삶의 파편들은 끈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몰려 왔다가 다시 부수수 흩어져 파도에 쓸려 나갔다.
이민생활 30년이 넘는 어머니는 바다를 보시며 옛 친구를 그리워하셨다. 언젠가 한국에 갔을 때 건강하던 그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그 친구를 중심으로 만났던 다른 친구들의 연락처를 몰랐고 살았던 지역이 완전히 변모해서 길을 잃으셨다. 그렇게 과거와의 절단을 느끼신 후부터 한국을 찾는 것을 꺼리셨다. 나이든 인척들이 세상을 떠난 소식도 바람으로 들으시고 멀고 낯설어져 버린 고향은 가슴으로 찾아갔다.
요즈음 무엇을 먹어도 도무지 음식 맛이 나지 않는다며 예전 한국에서 즐겼던 음식 맛을 곰곰이 떠올리셨다. 보리밥에 된장찌개 하나만 있어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에 우리는 함께 웃었다. 아들 며느리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해드려도 그 추억의 줄자에는 어림도 없다. 사람과 환경이 모두 변해 버린 현실을 받아 들이기에 어머니의 가슴은 아직 바다 저 멀리 그리운 과거에 있었다.
발가락 사이의 모래를 털어 내면서 이젠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나 떠날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고 하셨다. 지나간 세월에 아쉬움이나 허전함 보다 더 많은 감사함을 느끼신다는 어머니는 동서남북에 흩어져 번진 자손들이 모두 잘 지내니 마음이 편안하시다고 했다. 많은 가족들의 연줄이 그려진 도표를 책상앞에 붙여 두고 매일 아침, 그 자손들 하나 하나를 위해서 정성으로 기도하시는 어머니 덕분에 온 가족이 평안하게 살고 있음을 어머니는 아시려나 궁금했다.
바닷가를 떠나면서 나이 90을 보라보는 어머니는 60을 바라보는 나에게 \”건강 조심, 남편 사랑\” 훈계를 잊지 않았다. 열심히 살면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 편하게 세상을 보는 여유를 잃지 말라고 강조 하셨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2011년 어머니날 주말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