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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백화점의 원조

 

미국의 백화점 창시자 이자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

탁월한 판단력과 아이디어,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체신부 장관

65년동안 전세계에 YMCA건물을 지어준 사람

우리나라에도 YMCA건물을 지어준 사람

67년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헌신한 사람

장관은 부업이요 주일학교교사는 본업이라 말 한사람

존 워너메이커

– 1838년 7월11월 필라렐피아 변두리 지역 2층 벽돌집에서 태어남

– 아버지 넬슨 워너메이커 어머니 엘리자베스

– 1847년 학교에 들어간 존은 수학시간에 가장 흥미를 느낌

– 성경과 사전단어 찾기 놀이를 좋아함

– 존이 12살 되던 해 인디애나로 이사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함

– 존이 14살 때 아버지 사망

– 어머니는 목회자가 존은 사업가가 되기를 원함

 

벽돌공 아들의 꿈과 결심

존은 엄마의 심부름으로 실타래를 사러 친구 야곱과 상점에 가게 되었다. 어머니로부터 천조각과 돈을 주머니에 넣었는데 옷감샘플이 어디로 숨었는지 나타나지 않자 점원은 귀찮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너희같은 수상쩍은 녀석들 많이 보았지”라며 점원의 비꼬는 말에 존의 얼굴은 붉어졌고 비슷한 색의 실타래를 사서 문밖으로 나왔다. 그때 샘플 천이 만져졌고 색이 틀리자 존은 그 점원에게 돌아가서 말했다. “아저씨! 찾았어요. 색깔이 달라요, 방금 산거니까 다른 색으로 바꿔 주세 요” “아니, 내가 왜? 나는 강요하지 않았고 너를 상점에 보낸 네 엄마의 잘못이니까 귀찮게 굴지 말고 당장 꺼져라!” 존과 친구 야곱은 바깥으로 쫓겨나다시피 내몰렸고 억울하고 분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가 상점 주인이라면 언제든지 기쁜 마음으로 물건을 바꿔 주고 모든 고객들을 친절하게 대할 거야” 존은 결심하였다.

존은 단순히 돈버는 상인이 아닌, 상점에 들어오는 모든 고객들은 행복하게 하고 친절과 정직으로 대하는 미래의 거상을 꿈꾸었다. 비즈니스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결심함

탁월한 어린 장사꾼

존은 어린시절부터 장사와 샘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감자 사는 방법

학교에서 패트릭스의 날 기념 파티 때 쓸 감자를 구하기 위해 친구 야곱과 걱 정을함 돈이 없어 물건을 살수 없을 때 아버지가 물물교환을 하는 것을 봤던 존은 개구리와 감자를 바꾸자고 생각함. 개구리를 잡아 개구리 다리를 깨끗하게 다듬고 냅킨을 깔고 보기 좋게 예쁜 천으로 덮은 후 상점주인 호소플과 물물교환을 함. 감자 몇 개를 교환 할 수 있겠냐?고 호소플 아저씨가 묻자 야곱이 “6개요!”하고 외쳣다.

그러자 호소플 주인의 눈가에 잡힌 회심의 미소를 본 존은 순간 “한사람 앞에 여섯 개씩 이요!” 라고 외쳤다. 존의 말에 약간 당황하였으나 자신이 골라주는 감자로 받겠다는 조건하에 흔쾌히 열두 개의 감자와 교환 하였다. “너는 어떻게 아저씨가 각자 에게 여섯 개씩 줄 거라고 생각했니?” “두 가지 이유가 있지 하나는 감자 개수 여섯 개라 말 했을 때 아저씨 얼굴표정을 읽었어 아이들을 적당히 이용하려는 야릇한 웃음을 다른 하나는 값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어.”

소년 워너메이커는 협상할 때 상대방의 의중을 읽는 능력, 자신이 제시한 물건에 대한 정확한 가치 매기는 법을 알았다

쌓여만 가는 사과를 예쁜 바구니에 담아서 판 존은 “보기 좋은 것이 맛도 있다고”사과를 팔아 돈을 모았고 과일과 채소를 인디언들의 모카신과 물물교환 하여 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다.

너무 비싼 성경책

 성경책을 하고 싶었던 존은 헐락 선생님께 성경책을 부탁하였다. 예쁘게 생긴 빨간색 가죽 성경책의 값은 2달러 75센트였다. 존이 가진 돈은 37센트였기에 난감하였다. 선생님도 선뜻 사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선생님, 그 성경책 제가 살게요 오늘 37센트만 받으세요. 나머지는 일을 해서 버는대로 같아나갈게요.” 37센트를 뺀 2달러 38센트의 돈을 아버지의 벽돌공장에서 1년 반의 벽돌 나르기로 완전히 존의 것이 되었다. 결국 해낸 것이었다.

벽돌 소년

존은 교회마당에 포장이 안 되어 진흙탕이 되기 일쑤이던 예배당 입구를 벽돌공장에서 일을 한 후 받는 하루 7센트의 임금 일부를 쪼개 벽돌 한 장씩을 사서 깔기 시작 했다. 2년 넘게 거릴 일이 한달도 채 안돼 기적이 일어났다. 존의 한 일을 챔버스 목사가 교인들에게 알려 교회 마당만이 아니라 교회 건물을 헐고 새로운 교회를 신축함

위대한 인물들의 배후에는 멘토가 있다.

플라톤 뒤에는 소크라테스 가, 헬런켈러 뒤에는 설리반이 여호수아 뒤에는 모세가, 다윗 뒤에는 사무엘이 있듯이 위너메이커 뒤에는 인생의 스승, 존 챔버스 목사가 있었다. 워너메이커는 “나의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존 챔버스 목사님 입니다. 그 분은 내 인생의 모델 입니다”라고 말했다.

워너메이커가 주일학교를 처음 했을 때 그 이름은 ‘챔버스 선교학교’라 지었을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았다.

챔버스 목사는 – 필라델피아의 기독교 신앙을 주로 함

– 아일랜드 출생: 펜실베니아 로 이어온 장로교인 키는 크고 눈매는 강했다.

–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개혁 운동자

– 자기절제와 청빈 그리고 엄격한 영적 생활습관 으로 젊은이에게 도전 정신을 심어준 목회자

챔버스 목사와 만나 자신의 일과 신앙을 의논 했으며 청년 시절에 뜨거운 신앙의 불을, 영적 멘토로 조언과 영적 교훈에 충실히 따랐다.

청소년 시절 워너메이커는 멘토 챔버스 목사를 만나 그의 꿈과 인생의 목표를 신앙 안에서 바로 세웠다.

평생 동역자 D.L 무디

20살 때 YMAC 모임에서 공통의 관심사에 대화하고, 사역의 비전과 아이디어를 공유함으로 깊은 신뢰 관계를 쌓음

 헌신적인 친구이자 조력자로 열성과 조직을 이끌고 사람을 교제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 읽고, 주일학교 사역의 비전을 나누었다. 멋진 동역과 우정의 고나계를 지속했으며 서로에게 큰 힘과 용기를 북돋게 해주었다

D.L무디와 워너메이커의 공통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으며, 어린나이에 직업을 가지고 소년가장 역할을 했으며 성경으로 인생의 푯대를 삼았으며 YMCA 회원, 대표역임 YMCA 회관 걸립의 공로자 주일학교 교사 작은교회-> 당대 최고의 주일하교 건물 평신으로 사역

YMCA 와 함께 걸은 65년

청년 시절 YMCA(기독교 청년회)의 정식회원으로 활발한 활들을 했다. 타워 홀 의류점 점원으로 일하던 19세 때 매일 기도 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갔던 그는 혹시 가게 일을 소홀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출근, 마지막 마무리 후 퇴근했다.

의류점과 YMCA일로 주일을 제일 독립 교회에서 교사로 헌신하는 일로 일주일 내내 바빴다. 노동과 교회 봉사자 그의 삶의 전부였다. 폐결핵으로 요양후 YMCA 웃급 총무로 진로를 바꿈 YMCA 대표 조지 H.스미스는 조직 활성화를 위해 1천 달러에 영입 57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YMCA 조직은 1년 만에 2천명이 넘는 단체로 발전 워너메이커는 열정적이고 헌신된 리더로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단체로 체계적으로 관리 했으며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리더들과 팀워크를 이루는 리더쉽을 보여주었다.

YMCA의 목적대로 “청년들은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경을 바탕으로 한 영적 정신적 상태를 개선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드는 인구로 심각한 사회적 병폐가 대두되고 있던 시기였다. YMCA 리더들은 신앙교육과 다양한 생활훈련 프로그램으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워너메이커는 “금주 금연 서약 운동을” 링컨 대톨령과 함께 그 해악 알리는 문구 (술과 담배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암으로 사회를 파괴하기 위해 벼르고 있다 -A.링컨)의 전단지와 서약서를 만들어 금주 금연 운동에 동참을 호소했다.

1869년 YMCA 대표가 되었다. YMCA 모임을 운영해 청년 부흥 운동을 주로 하였으며 회관 건립도 하게 되었다. 워너메이커는 19살에 YMCA회원이 된 후 평생YMCA와 함께 했다. YMCA를 통해 자신을 헌신했고 젊은이들에게 믿음과 꿈과 희망을 주었다. 작은 모임에서 세계적인 단체로 끌어올렸다.

존 워너메이커가 세운 서울 YMCA

1903년 10월28일 활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창림, 1899년 조선 청년들이 YMCA 창설을 원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가가 북이 YMCA 국제 위 원회에 창설을 요구 1901년 질레트를 한국에 파송하여 1903년 복음전파를 위한 기독교 신앙 훈련, 사회봉사, 공동체 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YMCA가 탄생함

한국 YMCA 연표는 “1908년 미국의 실업가 존 원메이커의 거액의 기부금으로 종로2가 9번지에 3층 현대식 건물 벽돌양옥 약600평의 회관을 준공하게 되었다”고 기록됨 오늘날 YMCA는 세계122개국에 1만 4천 개의 조직과 4천 5백 만명이 넘는 회원을 가지 세계최대의 청년운동 단체로 발전하였고, 한국에도 40여개의 YMCA에 700여게의 각종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서울YMCA 건물은 6.25동란으로 전소 1958년 신축함

얼굴도 보지 못한 민족을 사랑해야 할 이웃과 전해 없는 민족에게 피땀 흘려 모았을 그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바친 워너메이커 에게 그리스도인들은 큰 사랑의 빛은 지고 있는 셈이다.

백화점 왕 존워너메이커

1861년 워너메이커와 나산 브라운은 오크홀(OAK HALL) 의류점을 청업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외치던 때라 전운이 감도는 긴장상태였기에 그만큼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하이 스트리트 남성복전문 의류점을 개업하고 4일후에 남북전쟁이 발발 워너메이커의 사업출발은 어두웠다. 워너메이커가 비전을 제시하면 나산은 잘 챙겨주고 받쳐주는 사람이라 손발이 잘 맞았다, 사업초기 이윤의 최소 생활비만을 제회한 나머지 사업 확장에 재투자 했다.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은 적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군복과 경비원 유니폼을 계약 의류점과 동시에 제조업과 소매업을 하는 상점으로 발전 시켰다. 창업을 하면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꿈꾸고 원칙도 세웠다.

비즈니스가 제대로 행해졌을 때 주인과 고객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고 확신했다, 그 당시로는 새로운 개념인 “고객의 권리”였다.

  워너메이커의 비즈니스의 4가지 필수 원칙

1. 정가판매를 실시한다.

2. 상품에 품질표시를 하여 소비자의 알 권리를 돕는다.

3. 반드시 현금거래를 한다

4. 구입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반품, 교환 할 수 있다.

워너메이커는 상업윤리가 세워지지 않아 부도덕하던 시대의 버즈니스의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였고 성실과 인내로 이러한 원칙을 충실히 지킴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시대를 열었다. 처음에도 구설수에 휘말렸다 인정받게 되고, 결국에는 비합리적인 풍토를 송두리째 바꾸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를 ‘현대 버즈니스의 개척자“로 부르게 된 이유이다.

* 독특한 광고

1800년대 만 해도 상점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소매업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였다. 워너메이커는 사업초기부터 광고의 중요성을 인식 독특한 아이디어와 광고 기법을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 포스터 광고

W&B라고 쓰여진 15CM 짜리 정사각현 포스터

며칠후“워너메이커&브라운의 오크 홀 의류점” 오픈을 알리는 광고 포스터 개점 첫날 24달러 67센트의 수입 67센트는 남겨두고 수입금 전액을 일간신문 인콰이어러 지에 광고 투자

* 대형 에드벌룬 광고

몇 개의 에드벌룬에는 “풍선을 가져오는 분에게 신사복 한 벌 공짜” 란 문구가 있었다.

의류점 앞 대형 입간판 차역과 도시의 중심 장소에 대현 가판을 새우는 홍보 전략

* 4페이지짜리 월간지 모든 사람의 저널을 발간하고 우편 발송도 함

상품광고만이 아닌 글삽화 칼럼 등 다양, 농업저널로 발간

* 광고 전단

 5달러 거폐 복사 낮은 가격에 옷 구입 할 수 있다고 홍보

* 요트시즌

 직원들이 요트복장을 입고 요트 깃발을 만들어 거리를 활보, 나팔 소리와 함께 행군하며 전단을 나눠주는 판촉활동을 함

*신문을 통한 기업 이미지광고

워너메이커는 광고 전략이나 판촉, 매사에 적극적이고 신선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문 광고를 통해 기업을 이윤보다 고객을 위해 존재하고 “항상 소비자편이고, 소비가자 왕” 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제품 가격들은 공정하고, 물건은 믿을만 하며 언제든지 반품 할 수 있고 돈도 100% 환불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신문에 전면 광고로 그랜드 디포 백화점 오픈 알림

신문 전면에 광고가 나간 것은 신문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기업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해 10만 달러가 (당시는 천문학적돈)넘는 신문광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러나 주일에는 광고하지 않는 조건이 붙음

1865년, 필라델피아 주소록모든 페이지 윗부분에 워너메이커 상징의 광고가 반복해서 실렸음

1911년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 건축 광고

워너메이커 백화점 높이 76cm 넓이 85cm 길이164m 이다 3만톤의 강철과 2만4천 톤의 화강암으로 지어졌고, 백화점 매장 공간만 5만4천평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매장이다.

* 기업 이미지 광고에 역점

음악회, 연극, 미술, 오르간 발품, 어린이날, 어머니날, 등 각종 행사개최 기업의 좋은 이미지를 심었다.

*백화점 “그랜드 디폰”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 필라델피아 전체를 아우루는 비즈니스

도시 한복판의 화물정거장 인수 “새로운 스타일의 상점” – “백화점”이란 새로운 유통 체례를 고안했다.

“백화점”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의 필요를 단 한번의 쇼핑으로 충족시켜 주었다.

*최고의 서비스, 놀라운 성장

불과 3년 만에 1879년 46개부서와 직원2천명 자동식 현금 운반기도 설치 에디슨의 도움으로 전기와 환기시설 등 최고의 서비스 제공 1882년에는 엘리베이터 설치1882년 두 배로 급성장 일하는 직원만 3.292명

1884년에는 직원 4천명으로 직접 재달 물건을 전달.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세계 최대의 백화점

1906년 그랜드 디포 백화점 맞은편에 16층짜리 “존 워너메이커 백화점”건물을 지은 후 다리로 연결 통로를 만들어 “진보의 다리”라 불렀다. 세계 최대의 백화점 건물이 완공 (공간만 5만4천평)

워너메이커가 버즈니스를 시작한 지 50년을 맞는 해였다. 50주년 행사 하이라이트는 당시 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의 축사였다 당시에는 대통령이 사업행사에 찾아와서 축사를 해준 경우가 전무 했다.

백화점의 참시자로, 상인의 왕으로“비즈니스의 개척자”로 불려졌다.

성공하기 위한 인생의 6가지 덕목

1. 근면: 목표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것

2. 고귀함: 말과 행동의 진실함

3. 유능함: 돈을 낭비하지 않고, 의무를 신속하게 보중 내지말고 벌려주거나 빌리지 않는 능력

4. 영예로움: 작은일에 소홀하지 않고 큰일에 두려워 안고 품위 떨어지는 사람과 교제하지 않고, 술먹지 말고, 도박하지 말며, 여자를 지극히 위해주고, 정직하며,불의와 타협하지 않을때 주어짐

5. 재물: 앞으로 덕목를을 잘 실천하면 자연히 따라옴 인생의 위대하고 소중한 것은 돈으로 살수 없음.

6. 행복: 행복은 작은 것에 서 시작한다

직원은 나의 소중한 가족

직원을 가족이라 불렀다 단순히 주인과 종업원의 수직관계가 아니라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지었다.

성과급을 함께 나누고, 직원을 평등하게 대해주면서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는 특별 대우는 해주었다.

한번 입사하면 평생 직원이 되는 것은 보통이고 장관들 보다 급여가 더 많았다.

직원 복지의 시초

그 당시 근로 환경은 열악했다 많은 시간의 노동과 피곤한 삶에 살았다. 본인 자신도 건강을 해친 적 이 있었기 때문이다.

– 6개월 이상 일한 모든 직원들에게 유급휴가를 시행한다.

– 토요일 오전 근무

– 여름 기간 토요 휴무제와 2주간 유급 휴가(나미 비즈니스 절반은 성공했다라고 말함)

– 백화점 문을 아침 10시에 열고 오후4시30분에 닫음

– 여름동안 직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대서양 바네갓 만의 하이트 섬 이러한 혜택을 제공 하는 것은 보람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투자이기도 했다.

– 직원의 근로환경과 복지 시설혜택도 넓혀나감

의료보험 제도, 교육기과 설립, 스포츠 센터 건립, 유급 훗가제 도입, 노동 시란 단축, 생명 보험기관 설립 등 이 시행되었다.

– 백화점 내의 의무실, 분위기 좋은 식당 등

그 결과 최상의 서비스와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백화점이 되었다.

백화점 50주년 기념일에 직원들의 애정이 담긴 봉투를 건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워너메이커가 태어난 시골집 땅문서 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감사의 표시로 인퇴 직원을 위한 복지시설로 사용할 30만 평의 땅을 기증하고 그 복지시설은 “하워드S 레지던스 하우스”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출생지 땅은 “로버트C.오그덴 병원을 설립 직원과 그 가족 그리고 저소득층 사람까지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워너메이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고 말보다는 실천하고 고객을 왕으로, 직원을 왕으로, 가족으로 끌어안은 위대한 사람이다.

워너메이커의 5가지 성공 습관

1. 새벽형 인간

2. 긍정적인 삶의 태도

3. 절약하고 저축하는 습관

4. 독서하는 습관

5. 기도하는 습관

■  Mothers Day 제정

어머니날은 애나 자비스라는 여교사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 시작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날을 국가적 행사로 치루는 일은 냉담할 뿐이었다.

1908년 5월 둘째 주일에 백화점 직원들과 그 어머니를 모시고 기념품을 선물하고 사랑과 감사도 표하였으며 카네이션도 달아드렸다.

어머니날 행사는 신문에 크게 보도 되었고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14년 우드로윌슨 대통령은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날”로 공식 선포했다.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되다.

제23대 대통령 해리슨이 당선되고, 워너메이커는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하자 선거에서 패배한 민주당 사람들은 강력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백화점 주인이 연방 정부의 장관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뉴욕 월드지의 편집자인 요셉 플리트젤은 워너메이커의 부정을 언론에 폭로하여 문제를 삼을 목적으로 백화점을 찾았으나 인신공격과 정치적 중상모략에 불과하고 오히려 정직과 신용과 섬김을 바탕으로 이룬 결과들을 드러냈다. 워너메이커는 국민의 봉사자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비즈니스에서 보여주었던 열정과 헌신을 체신부 장관 자리에서도 보여주었다.

체신부 장관으로의 업적

1.시골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우편물이 무료로 배달 되도록 함.

2.소포우편제도를 우체국의 업무로 정착시킴.

임기 내에는 못하였으나 1913년 1월1일 첫 번째 소포꾸러미를 보내는 특권을 누 렸다.

3.우편복권제도 폐지(정부의 돈 버는 수단)

4.우체국예금 제도를 처음 제안

5.기념우표시리즈 발행(첫번째 기념우표는 콜럼버스우표 16장세트)

6.우편박물관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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