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목사 떼인것 같아서 그런 것이지요

우리 목사 떼인것 같아서 그런 것이지요 

중국 산동성에서 21년간 선교사로 사역하셨던 방지일 목사님은 선교사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피선교지인들은 받기만 하는 일방통행(one way) 선교는 바른 선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진정한 선교는 선교사와 피선교지인들이 서로 주고 받는 쌍방통행(two way)의 선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선교사가 사랑으로 피선교지인들을 돌보고 섬겨야 하지만 피선교지인들에게도 돌봄과 사랑을 받아야, 그것이 성경적이고 성숙한 선교라고 말씀하셨니다.  그리고 방지일 목사님은 당신이 오래전 중국 교인들과 주고 받은,  그리스도안에서의 깊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사건은 근 60년이 넘는, 오래 전 일이지만 아직도 그 경험은 방목사님에게 새로운 감회와 감사의 조건이 될 뿐 아니라, 그 사건의 당사자도 아니며, 그 사건을 간접적으로 듣게 된 저같은 사람에게까지 눈시울을 적시며, 제 안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 감동적인 이야기는 1945년 일본이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서 마침내 대동아전쟁이 종결되었을때, 방지일 목사님께서 당신의 선교지에 갑자기 몰려닥친 동포 난민들을 돌보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1945년 일본이 마침내 미군에게 무조건 항복했을 당시 방목사님은 중국 산동성에서 중국교인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한인이라곤 한 사람도 없던 방목사님의 선교지에 일본군의 투항 이후 사방에 숨어 살던 우리 한국 동포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 했습니다.  조국을 빼앗긴 후 고향을 떠나 중국 각처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던 동포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하고자 했을때 방지일 목사라는 한국 선교사를 찾으면 숙식은 물론 한국까지 귀국하는 것을 도와준다는 소문을 듣고 몰리게 됐던 것입니다.  처음 수백명이였던 동포들은 차츰 그 수가 늘어 수천명, 그리고 나중에는 수만명으로까지 숫자가 불어났습니다.  방목사님의 산동성 선교지는 동포 난민들에게 피신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포들이 미군이 제공해준 귀국선에 여러 차례 나누어 조국에 귀국할때 까지 이들을 돌보는 것은 방지일 목사님의 몫이였습니다. 방목사님께서는 산동성에 주둔한 미 해병 제 6 사단 사령관 Clement 준장을 찾아 동포들의 교통편을 부탁하고, 그들의 숙소를 요청하고,  또 이들이 본국에 돌아갈때 까지 먹을 식량등 주식품까지 타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상황을 방 목사님은 이렇게 회고하십니다.

“…어느날 우리 동포들이 선교사가 있는 곳까지 배도 굶주린채 걸어오다가 지치고 지쳐 2,3백리에서 도저히 더 올 수 없게 되었으니 구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미사령관 Clement를 찾았다. 그는 G3 수송대 소령을 불러 부탁하기를 그들의 편의를 보아 주라 명한다.  …군용 트럭 10여대가 헌병의 호위아래 가서 [동포들을] 실어온다.  트럭이라 포장도 안된 길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 오는 그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이미 천을 얻어 솜바지 저고리 수백벌씩 했다.  목욕 시키고 입혀 숙소에 있게 하고 그 식품도 다 얻어대야 했다. 한참 모여 들 때는 내가 열 몫을 해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갑자기 귀국하려 몰려든 수만명의 동포 난민들을 돌보는 일로 불철주야 바쁘셨던 방지일 목사님은 당신이 섬기시던 중국 교인들을 그 전만큼 돌보지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주중에는 동포들의 숙식, 그리고 귀국선 주선 알아보는 일로 눈 코 뜰새없이 바쁘셨지만 그러나 주일 날은 만사를 제쳐놓고 중국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날도 방지일 목사님은 동포들을 위한 일들로 하루종일 쫓아다니시다가 파김치가 다 되어 밤 12 시가 휠씬 넘어 집에 들어오시는데, 목사관 사택 앞에 중국 교인들이 약 10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이들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이유가 있겠다 생각하시면서 물어보셨습니다.

“아니 이 밤중에 어쩐일로 오셨어요?”

“방목사님 보고 싶어 왔어요.”

“그럼, 들어갑시다,”

방목사님이 중국교인들을 사택 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집안에 들어오면 자초지종 이야기 할 줄 알았건만 중국 교인들은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어색한 침묵을 깨고 한 사람이 훌쩍 거리면서 울기 시작하니 모든 교인들이 다 같이 울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울다가 한 사람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방목사님, 우리는 여지껏 방목사님이 우리 목사님이신 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우리 목사님이 아니군요  …이제 한국 사람들이 모여드니 우리는 뒷전이 되었군요… 이제 방목사님을 만나려해도 만날 수 없고, 우리는 목사를 잃어버린 고아가 된 것 같아,  목사님을 만나려고 이렇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같이 흐느껴 울기 시작합니다.  중국교인들의 이야기를 잠잠히 듣던 방지일 목사님 역시 갑자기 가슴속에서 뭉클한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중국교인들과 함께 울기 시작합니다.  그들과 한참 동안 함께 울던 방 목사님은 눈물이 범벅이 된 목소리로 중국교인들을 차근차근 타일르기 시작합니다.

“아니야, 나는 그대들의 목사입니다. 그대들이 먼저 난민으로 이곳에 오지 않았나요, 내가 여러분들이 있을  집도 마련해 드리지 않았소?  또 생활도 하게끔 되지 않았소?
이제 이 한국인들은 여기에 남아 살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귀국선타고 한국에 다 돌아 갈 것인데, 이들을 돌아가게 하는 일이 쉽지 않아 나도 심히 고달프군요.  지금 한국인들이 돌아갈 배를 교섭중인데, 그 배들이 교섭되면 이 사람들은 다 돌아갈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돌아가면 내 일은 끝나게 됩니다.  내 비록 이들을 도와주느라 눈, 코 뜰새 없이 바빴지만 그래도 주일마다 한주일도 걸르지 않고 내가 설교했지 않아요?”

“방목사님, 사실 우리가 방목사님 마음 모르는 것은 아니나,
방목사님 너무 보지 못하게 되니까 우리 목사 떼인것 같아 그런 것이지요…”

그러면서 또 중국교인들은 엉엉 울기 시작합니다.

그 말을 들은 방목사님 역시 그들을 달래며 그들과 함께 서로 껴안은채 흠뻑 울게 됩니다. 그리고 방지일 목사님은, 이미 60년도 넘는 그 사건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 정다웠던 장면 다 같이 흠뻑 울었다.  이 정은 목자와 양의 그 두터운 정이였다.
나는 밤중에 저들과 같이 운 그 사실을 지금도 감격에 넘치게 생각된다. 그들과는 간격이 조금도 없이 그리스도의 애정을 같이 한 것으로 나는 중국 21년간의 역사에 감사한다.

“내 자신으로는 [내 중국선교에] 무슨 성과가 있었는가를 묻는다면 묻는 물음에 적중한 대답이 아니라 할런지도 모르나 나는 이 한마디로 대답하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저들과 같이 깊게 넓게 높게 또 길게 맛보았다”는 이 말이다.  나는 [1957년] 한국 돌아와서 담임목사 되려 하지는 않았다.  비록 지역적으로는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나는 저들의 목사라는 이 긍지를 돌아와서도 1965년까지 선교사의 이름으로 있었다….

“…. 이제 [한국에] 회국하여 40여년이 되었는데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꿈만 같다.  이 모든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며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도 없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나의  나됨 (84-85쪽 참조)  임마누엘 (346-48쪽 참조)

저는 개인적으로 방지일 목사님께서 중국 교인들을 오랜 세월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모습에도 감동을 받지만, 중국 교인들이 방지일 목사님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옷깃을 다시 여밀게 되며 양떼들이 참목자를 알아본다는 성경의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떼들을 위해 생명을 내놓기까지 사랑한 참목자를, 그 양떼들역시 동일한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참목자의 표본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며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나는 주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 처럼, 또한 방지일 목사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섬기라 허락하신 양떼들을 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사랑으로 돌보고 있는지 제 사역의 본질적인 방향과 자세들을 다시 조명하곤 합니다.

“우리 목사 떼인 것 같아서 그런 것이지요…”

방지일 목사님같은 참목자의 사랑과 돌봄을 받았던 중국 교인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이였습니다. 또한 그 중국성도들의 마음속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방지일 목사님 역시 참 행복한 목회자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런 목자가 이 시대에 더 많이 나올 수 있기를, 참 목자중 목자이신 주님께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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