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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예배다?

‘꼭 교회 가야만 예배인가’에 대한 답변

이 글은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교회가 주일예배를 중단·대체한 것을 계기로 논란이 된 ‘주일에 교회에서 하는 예배만 예배인가, 삶도 예배라고 할 수 없는가’라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입니다. 기독연구원느헤미야 김동춘 교수가 정리한 글입니다. – 편집자 주

나는 툭하면 “삶이 예배다” 하면서 예배를 삶으로 퉁치는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삶이 예배다”란 말은 비유법이지, 직설법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예배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살아야 한다(롬 12:1)는 말이지, 그렇다고 삶 자체가 예배는 아니다.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되도록 일상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의미에서 삶은 예배다. 그래서 “예배는 예배이고, 삶은 삶이다”라는 구분이 필요하다. 우리가 “예배는 삶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삶이 예배다”라는 논리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며 혼동이다.

물론, 더 말할 것도 없이, 예배와 삶은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예배는 삶 속에서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당에서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일상에서, 일터에서,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간다. 그러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는 교회의 예배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곳이 예배의 자리가 된다. 그래서 “모든 삶이 예배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모든 곳이 예배의 자리다: 예배의 일상성, 일상의 예배

따라서 교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다. 모든 삶의 영역이 예배하는 곳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음 받았다. 바다도, 산도, 바위도 하나님을 예배하며, 과학기술도, 학문도, 사상도, 이념도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은 인격적이든, 비인격적이든, 혹은 구조이든, 구조악이든,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우상을 숭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예배한다.

특별히 인간은 모든 곳에서 예배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향해 예배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쇼핑센터에서 예배하며, TV 드라마 앞에서, 스포츠 경기장에서, 그리고 정치권력을 향해 예배한다. 소비적 욕망에 빠진 인간은 상품을 예배한다. 물신숭배에 끌려 다니는 소비적 인간은 예배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 내가 열망하는 모든 것은 예배의 대상이 되며, 우리는 그것을 예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의 예배는 교회 안에 국한되지 않으며, 교회 밖에서도 예배하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교회 이후 예배”가 있으며, “예배 후 예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예배란 “섬기다”(아바드)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로 살고 있기도 하지만, 교회 밖 세상에서는 물신숭배의 소비자로, 맘몬의 포로자로, 문화 중독자로 예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삶이 예배다”라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모든 것이 예배라면, 무엇이 예배인가?

그러나 모든 것이 예배이고, 모든 삶이 예배가 된다면, 과연 무엇이 예배인가? 정말 모든 삶이 예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선교학자 스티븐 닐은 “모든 것이 선교라면, 아무것도 선교가 아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예컨대 태권도 선교도 선교이고, 축구 선교도 선교이고, 미용 선교도 선교라면, 과연 무엇이 선교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삶이 예배가 된다면, 도대체 예배란 무엇인지, 그리고 예배의 정체(identity)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예배이고, 저것도 예배가 된다면, 그럼 무엇이 예배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배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의례적 행위로 드려지는 그 무엇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개념상의 혼동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삶이 예배다”라고 한다면, 커피를 마시는 것도, 산책하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전부 예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 우리가 교회라는 특정 장소에서, 예배 형식을 갖추어 드려야 할 의식적인 예배, 의례(ritual)로서 예배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은 이들이 “꼭 교회에서만 예배인가?”, “모든 삶이 예배가 아닌가?” 하면서 “예배의 일상성”과 “일상의 예배”를 말하다가, 급기야 교회의 예배를 죄다 부정하는 “예배 무용론자”에 빠지는 넌센스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예배와 삶: 분리가 아닌, 구분을(not separation, but distinction)

우리가 무심코 “삶이 예배다”, “예배는 삶이다”라고 말하는 동안 “예배와 삶”에 대해 크리스천 대중의 신학적 사고에 큰 혼선을 초래했다. 예배와 삶의 논리적 혼선을 정리하기 위해 몇 가지 유사 사례를 소개한다.

가장 대표적인 논리의 혼선은 “예수와 민중”을 동일시했던 민중신학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예수는 민중이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민중이 예수다”라고 주장했다. 예수가 민중을 위해 사셨고, 민중의 예수로 사셨다면, “예수는 민중”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병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가 민중이라면, 민중이 예수다”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했다. 예수를 민중과 동일시하려던 민중신학은 논리의 역방향으로 민중을 예수와 동일시하는 지점까지 밀고 나가면서 예수와 민중 관계에 엄청난 신학적 혼선을 초래하였다. 민중신학은 예수와 민중을 구분했어야 했다. 예수와 민중 사이의 주객 도식(subject-object schema)을 깨뜨렸을 때, 예수는 민중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구원의 대상”인 민중의 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중과 예수를 필요 이상으로 일치된 관계로 보았던 이 논리는 예수를 민중으로부터 구별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예배와 삶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정하기 위해서 “분리되지는 않지만, 구분되어야 한다”는 공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절묘한 공식을 칼케돈 신경에서 찾을 수 있다. 칼케돈은 성육신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신성과 인성이 “혼합됨이 없이”, “분할됨 없이’, “분리됨 없이” 존재하신다고 진술했다. 칼케돈의 진술은 두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구분되어 있으며,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신적인 차원을 수호하려다가 인간적인 차원을 배제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인간적인 차원을 강조하다가 신적인 차원을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삶이 예배다”라고 할 때,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고, “예배는 삶이다”라고 할 때, 예배는 삶이 되고 만다. 이런 방식을 환원주의(reductionism)라고 한다. 이런 신학적 이항 명제를 구분하지 않고 환원하는 데서 예배와 삶의 문제가 혼선을 일으킨다. 환원주의의 오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전도와 사회정의”, “하나님을 아는 것과 정의를 행하는 것”의 관계에서 자주 발견된다.

환원주의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복음 전도와 사회정의의 관계를 예로 살펴보자. 사회참여적 교회나 행동주의 크리스천은 “사회 속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이 곧 교회의 전도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사회 행동과 사회적 실천이 바로 복음의 증거이며, 전도 활동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사회정의가 전도를 대신한다. 반대로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 전도에 주력하는 교회나 선교 단체는 교회가 위탁받은 지상명령은 오로지 복음 전도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최상의 사회정의는 전도 활동”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으로서 자비와 정의 실천은 사라지고 전도만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전도가 사회정의로 환원되거나, 사회정의가 전도로 환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구분할 필요가 있다.

복음 전도는 교회의 전도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를 알게 하여 새로운 생명을 획득하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 주된 과제이다. 반면 사회정의는 교회의 사회 행동(social action)과 사회봉사(social service)를 통해 사회 속에 만연한 불평등과 구조악의 제거에 주력하여 사회의 개선과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주된 과제이다. 따라서 교회의 정의 활동이 전도의 통로가 된다고 하여 전도라고 할 수 없듯이, 교회의 전도 활동이 결과적으로 사회정의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하여 사회정의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복음 전도와 사회정의는 각각 별개이며, 구분되어야 한다.

마찬가지 논리적 혼선을 피하려면, “예배는 예배이고, 삶은 삶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차원의 행위라면, 삶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차원의 행위다. 물론 인간에 대한 인간학적 행위는 곧장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행위와 직결된다(마 25장).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행위는 인간과 관련된 행위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예배와 삶은 분리해서도 안 되지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분리가 아닌, 구별”(not separation, but distinc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예배와 삶을 구별하다가 그 둘을 전혀 상관없이 만드는 이원론의 오류를 주의해야 하고, 예배와 삶을 연결하려다가 그 둘을 뒤섞어버리는 동일화의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는 예배의 “차원”이 있고, 삶은 삶의 “차원”이 있다. 예배는 예배의 “영역”이 있고, 삶은 삶의 “영역”이 별개로 존재한다. 그러니 예배와 삶이라는 고유의 개별 영역을 혼동하거나 뒤섞지 말아야 한다.

삶이 예배다! 분명 매력적인 표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배와 삶의 관계는 한쪽으로 편중되지 않게 접근해야 한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가 <주의 기도>에서 말한 것 처럼, 우리는 “신학주의”의 오류와 “세속주의”의 오류에 빠지는 위험을 주의해야 한다.

신학주의의 오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 말씀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복음만이 모든 문제의 해답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너무 순진한 발상에 사로잡혀 있다. 반대로 세속주의의 오류는 해답의 실마리를 기독교 신앙의 기반이나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서 찾지 않고, 편리한 인문주의 논리를 동원하여 자유주의적 신앙 경향에 재빨리 응대하면서 쉬운 답변을 주려고 한다. 그들은 너무 영악한 발상에 사로잡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예배에만 올인하는 신학주의에 빠져 있거나, 예배를 경원시하고 삶을 강조하는 세속주의에 치우쳐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삶은 예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배 혐오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삶이 예배”라는 이 친근한 생각은 한번 더 숙고해 보아야 할 문제다.

김동춘 / 기독연구원느헤미야 전임연구위원으로 조직신학과 기독교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사회적 제자도를 추구하는 신앙 공동체를 위해 홍대 근처에서 주일예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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